- ① 인사말
- ② 1부 전태일의 어린시절
- ③ 2부 전태일의 눈
- ④ 다락방 봉제공장
- ⑤ 3부 전태일의 실천
- ⑥ 모범업체
- ⑦ 4부 전태일의 꿈
3부 전태일의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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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제공장에서 목격한 부당함
전태일은 어린 견습공들이 일한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미싱사 월급보다 줄어들지만 직원들의 임금과 입사, 해고까지 관리하는 재단사가 되기 위해 재단 보조로 재취업했습니다.
1967년 전태일은 재단사가 되었지만, 어린 견습공을 돕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혼자 힘으로 열악한 근무 환경과 장시간‧저임금의 노동 현실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전태일은 아버지를 통해 알게 된 ‘근로기준법’을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평화시장에서는 근로기준법에 있는 1일 8시간 근무, 유급휴일 제공, 18세 미만 근로자의 야간작업 금지 등이 지켜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1967년 전태일은 재단사가 되었지만, 어린 견습공을 돕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혼자 힘으로 열악한 근무 환경과 장시간‧저임금의 노동 현실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전태일은 아버지를 통해 알게 된 ‘근로기준법’을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평화시장에서는 근로기준법에 있는 1일 8시간 근무, 유급휴일 제공, 18세 미만 근로자의 야간작업 금지 등이 지켜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전태일의 친필 일기장
22년의 짧은 생애 동안 남긴 전태일의 일기장 복제품입니다.
일기장에는 가난한 현실과 미래에 대한 고민, 소설, 편지,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참혹한 노동환경과 모범업체 설립 계획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동운동의 시작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의 준수를 위해, 1969년 10명의 재단사를 모아 바보회를 조직했습니다.
바보회라는 모임 이름은 노동조건이 법으로 정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보같이 업주에게 당하기만 했던 것을 탄식하며 정한 것이었습니다.
회장 전태일의 주도하에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노동 환경 실태를 조사했고, 시청과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활동 자금 부족과 성과 미흡으로 바보회 활동은 중단됐지만, 전태일은 포기하지 않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평화시장의 실태를 호소하는 편지를 작성했습니다.
1970년 9월 삼동회를 조직하여 다시 실태조사를 시작했고, 동양방송, 시청,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등 투쟁을 재개했습니다. 전태일이 평화시장을 실태조사한 자료는 경향신문에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이란 제목으로 보도됐습니다. 기쁨도 잠시 노동청 관계자를 상대로 면담과 시위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1970년 9월 삼동회를 조직하여 다시 실태조사를 시작했고, 동양방송, 시청,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등 투쟁을 재개했습니다. 전태일이 평화시장을 실태조사한 자료는 경향신문에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이란 제목으로 보도됐습니다. 기쁨도 잠시 노동청 관계자를 상대로 면담과 시위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평화시장 노동실태 조사용 설문지
바보회에서 평화시장 노동실태 조사를 위해 제작‧배포한 설문지로, 직종별로 근무시간, 직업병, 휴일 근무, 임금 등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삼동회 조사 시에는 바보회 때 제작한 설문지 하단에 기재된 바보회를 오려서 재사용했습니다.
전태일은 이 설문지를 바탕으로 노동청과 언론에 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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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의 결단
그해 국정감사가 끝나자, 기만과 좌절은 더욱 커졌고 ‘근로기준법’ 화형식 시위를 준비했습니다.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 시위가 경찰에 저지당하자,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재봉틀이 아니다’를 외치며 분신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동료들의 노동환경을 개선하고자 했습니다.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 시위가 경찰에 저지당하자,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재봉틀이 아니다’를 외치며 분신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동료들의 노동환경을 개선하고자 했습니다.
근로기준법 해설
근로기준법 해설서 복제품입니다.
전태일은 법을 알아야 근로조건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려운 한자로 되어 있는 근로기준법을 공부하기 위해 항상 책을 들고 다녔습니다.
전태일이 분신으로 세상에 항거했을 때도 손에 근로기준법 책을 들고 있었다고 합니다.
불탄 근로기준법 전시물을 통해 한 줄기 빛과 같던 근로기준법이 쓸모없음을 알고 좌절하며 괴로워했을 전태일의 마음을 차분히 느껴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