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소장품] 2025.6 구로동맹파업, 민주노동운동의 불씨가 다시 타오르다!
- 관리자
- 2025.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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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기념관 프로젝트 전시 <이달의 소장품> 전태일기념관의 <이달의 소장품>은 기념관 자료를 통해 노동 역사를 재조명하여 노동권 보장을 위해 행해졌던 다양한 노력을 되짚고 노동권 보호의 필요성을 알리는 프로젝트 전시입니다. 6월. 구로동맹파업, 민주노동운동의 불씨가 다시 타오르다! 1983년 말, 전두환 정권 하의 강경 통치 기조가 다소 완화되면서 노동운동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84년에는 민주노조운동 출신 활동가들과 노동 현장에 진입한 학생운동 출신 노동자들이 주축이 되어 1984년 3월, ‘한국 노동자 복지협의회’(노협)를 창립했다. 노협은 노동자의 복리 증진과 장학, 법률 구조, 출판·문화 사업 등을 통해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을 목표로 결성됐다. 노협은 노동자 투쟁을 지원하고, 노동법 개정 청원운동 등을 주도했다. 이사회는 천주교 인사와 사회 저명인사로 구성됐으며, 운영위원은 청계피복, 원풍모방, 동일방직, Y·H, 반도상사 등 80년대 초 해산된 민주노조 출신 인사들이 참여했다.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구로공단 지역에서도 민주노조 인정 투쟁이 활발히 전개됐다.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차별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은 대우어패럴, 대한마이크로,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효성물산 등에서 민주노조를 결성했다. 각 노조는 조합원 교육과 소모임 활동을 통해 노동자 의식을 높이고 활동가를 양성했으며, 노조 간 소모임 교류와 합동 교육 등을 통해 연대의식을 강화했다. 1985년 6월 22일 대우어패럴 노조 간부의 구속을 계기로, 24일부터 대우어패럴 노동자의 항의 파업이 시작됐다. 파업은 곧 구로공단 내 민주노조의 동맹파업으로 확산됐다. 청계피복노동조합과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는 사회단체도 연대 투쟁을 적극 지지했다. 구로지역 노동자들은 파업과 태업, 낙서, 유인물 배포 등 다양한 방식으로 투쟁했다. 구로동맹파업은 대우 구속자 석방 요구에서 시작되어, 민주노조 인정 투쟁으로 확대됐다. 민주노조 탄압 중단, 노동악법 철폐, 어용노조 타파, 노동자의 최소 생계 보장 및 복리 증진이 파업의 주요 목적이었다. 대우어패럴에 이어 가리봉전자, 효성물산, 선일섬유 노조가 동맹파업에 돌입했다. 25일에는 남성전기, 세진전자, 롬코리아, 27일에는 삼성제약, 28일에는 부흥사까지 투쟁에 동참했다. 또한, 26일 민주화운동 단체 22곳, 27일 각 종교단체가 지지 농성에 나서 사회적 연대투쟁으로 확대됐다. 경찰의 공포 분위기 조성과 음식물 차단으로 대우어패럴 농성 시위대는 100여 명으로 줄었다.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는 자진 해산했고 부흥사는 강제해산됐다. 6월 28일에는 대학생 18명이 식량과 의약품을 들고 농성장에 합류하여 사회적 연대를 보여줬지만, 대우어패럴 농성은 다음 날인 6월 29일 폭력배와 사복경찰 투입으로 강제 진압됐다. 1980년대 노동자의 상징적 투쟁인 구로동맹 연대 파업에는 총 2,500여 명이 참여했고, 이 과정에서 43명 구속되고 700여 명 해고 및 강제 사직당했다. 구로동맹파업은 다시 일어선 민주노조운동의 힘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구로지역 노동자들은 굶주린 몸으로 거대한 회사와 경찰의 탄압에 맞서 함께 싸웠다. 학생운동, 시민사회, 종교계 등이 연대 및 지원에 나서며 사회적 연대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이는 이후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밑거름이 됐다.